셀러 문을 열고 병을 하나 꺼내 들었는데, 라벨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병목이었습니다. 짙은 자줏빛 캡슐 한가운데에 하얀 글씨로 P와 M이 겹쳐져 있습니다. 처음엔 무슨 문양인가 했는데, 돌려 보니 아래쪽에 PERROT-MINOT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만든 집 이름 앞글자 두 개를 엮어 놓은 겁니다.

오늘 꺼낸 병은 페로 미노(Perrot-Minot) 샹베르탱 그랑 크뤼 비에이유 비뉴 2015입니다. 이름이 길지요. 저도 처음엔 한 번에 못 읽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병을 앞뒤로 돌려 보면서, 이름을 한 덩어리씩 잘라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 병, 한눈에 정리하면
| 항목 | 내용 |
|---|---|
| 와인 이름 | 샹베르탱 그랑 크뤼 비에이유 비뉴 (Chambertin Grand Cru Vieilles Vignes) |
| 만든 곳 | 페로 미노 (Perrot-Minot), 모레 생 드니 마을 |
| 지역 | 프랑스 부르고뉴, 코트 드 뉘 |
| 빈티지 | 2015 |
| 포도 | 피노 누아 |
| 도수·용량 | 13%, 750ml |
| 상태 | 아직 따지 않음 |
표로 보면 간단한데, 실제 라벨에는 이게 영어도 아니고 불어로 띄엄띄엄 적혀 있어서 하나하나 찾아야 했습니다.
앞면에는 집 한 채와 이름 세 줄뿐입니다

앞면 라벨은 정말 단출합니다. 맨 위에 펜으로 그린 듯한 오래된 집 한 채, 그 아래로 2015, CHAMBERTIN, GRAND CRU, PERROT-MINOT. 이게 전부입니다.
보르도 와인을 꺼냈을 때는 라벨에 성 그림이 크게 들어가 있고 글씨도 화려했는데, 부르고뉴 병은 이렇게 수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수수한 라벨에서 제일 큰 글씨가 만든 사람 이름이 아니라 CHAMBERTIN, 밭 이름이라는 게 재미있습니다.
부르고뉴는 "누가 만들었냐"만큼 "어느 밭에서 났냐"를 크게 칩니다. 그래서 밭 이름이 라벨 한가운데 제일 크게 들어갑니다. 지난번 라벨 읽는 법 글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샹베르탱이라는 밭은 어디인가요
샹베르탱은 부르고뉴 코트 드 뉘에 있는 주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마을의 포도밭입니다. 마을 이름에도 샹베르탱이 붙어 있지요. 원래 마을 이름은 주브레였는데, 이 밭이 워낙 유명해지니까 마을 이름 뒤에 밭 이름을 붙여 버린 겁니다. 밭이 마을 이름을 바꿔 놓은 셈이니, 얼마나 대접받는 밭인지 짐작이 갑니다.
크기는 생각보다 작습니다. 13~15헥타르 정도라고 하니, 축구장 스무 개 남짓한 땅입니다. 이 마을에는 이름에 '샹베르탱'이 들어간 그랑 크뤼 밭이 아홉 개나 있습니다. 샤름 샹베르탱, 그리오트 샹베르탱, 샤펠 샹베르탱 하는 식으로요. 그중에 아무것도 앞에 안 붙고 그냥 '샹베르탱'이라고만 부르는 밭이 바로 이 밭입니다. 이름이 제일 짧은 게 제일 원조라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도 들고 갔다는 와인
샹베르탱을 찾아보면 꼭 따라 나오는 이름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이 이 밭 와인을 유난히 좋아해서 원정길에도 챙겨 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황제가 된 뒤에는 이 와인만 마셨다는 기록도 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아끼던 와인을 대부분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지금 같으면 와인 좋아하는 분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인데, 그 시절엔 와인에 물을 섞어 마시는 게 흔한 일이었다고 하네요.
아무튼 이 이야기 덕분에 샹베르탱은 '왕의 와인', '황제의 와인' 같은 별명이 붙었습니다. 셀러에서 이 병을 꺼내 식탁에 올려두니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되더라고요.
그랑 크뤼, 비에이유 비뉴는 무슨 뜻인가요
이름에 붙은 나머지 두 말도 풀어 보겠습니다.
그랑 크뤼(Grand Cru)는 부르고뉴 밭 등급 중 제일 높은 칸입니다. 부르고뉴는 밭마다 등급이 정해져 있는데, 아래부터 지역명 → 마을명 → 프리미에 크뤼 → 그랑 크뤼 순서입니다. 그랑 크뤼 밭은 부르고뉴 전체에서도 아주 적은 비율이라, 라벨에 이 두 단어가 있으면 일단 귀한 밭에서 났다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비에이유 비뉴(Vieilles Vignes)는 앞면에는 없고 뒷면에만 적혀 있었습니다. 불어로 '오래된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나무가 나이를 먹으면 포도송이는 적게 달리는 대신 맛이 진해진다고 합니다. 다만 몇 살부터 '오래된 나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법으로 정해진 게 없어서, 만드는 집마다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등급이라기보다 만드는 사람이 "우리 나무 나이 좀 있어요" 하고 알려주는 말에 가깝습니다.
뒷면에는 일본어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병을 돌리면 뒷면 위쪽에 하얀 스티커가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병이라 일본 수입사가 붙인 겁니다.
가타카나라 천천히 읽어 보니 내용은 우리나라 한글 스티커랑 거의 같습니다.
- 品名(품명): シャンベルタン グラン クリュ ヴィエーユ ヴィーニュ 2015, 샹베르탱 그랑 크뤼 비에이유 비뉴 2015
- 生産者(생산자): ペロ・ミノ, 페로 미노
- 容量(용량): 750ml
- 原産地(원산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 맨 끝에 크게 적힌 果実酒(과실주)
와인을 일본에서는 '과실주'로 분류해서 적는다는 걸 이 스티커 보고 알았습니다. 그 아래에는 음주운전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임신·수유 중에는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같은 경고 문구도 적혀 있습니다. 나라만 다르지 들어가는 내용은 비슷하더라고요.
그 아래 원래 뒷면 라벨에는 GRAND VIN DE BOURGOGNE, CHAMBERTIN, GRAND CRU, VIEILLES VIGNES, 그리고 APPELLATION CHAMBERTIN GRAND CRU CONTRÔLÉE가 적혀 있습니다. 이 마지막 줄이 "이 와인은 샹베르탱 그랑 크뤼 규정을 지켜 만들었다"는 원산지 표시입니다. 그 밑에 PERROT-MINOT, MOREY-SAINT-DENIS. 만든 집과 그 집이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라벨에 '도멘'이라는 말이 없길래 찾아봤습니다
지난번에 샤또, 도멘, 와이너리 이야기를 쓴 뒤로 라벨을 보면 그 단어부터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병은 앞에도 뒤에도 그냥 PERROT-MINOT입니다. 도멘(Domaine)이라는 말이 안 보입니다.
찾아보니 페로 미노는 자기 밭 포도로 만든 와인은 '도멘 페로 미노'로 내고, 그랑 크뤼 중 일부는 포도를 사 와서 '도멘' 없이 이름만 붙여 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병이 꼭 사 온 포도로 만든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외 와인 판매 사이트에서는 같은 2015 샹베르탱을 '도멘 페로 미노'로 적어 둔 곳도 있어서, 라벨만 보고 어느 쪽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도멘'이라는 한 단어가 있고 없고에 이런 차이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페로 미노는 어떤 집인가요
페로 미노는 모레 생 드니 마을에 있는 집입니다. 지금은 아버지 앙리에게서 1993년에 물려받은 아들 크리스토프 페로 미노가 이끌고 있습니다. 앞면 라벨에 그려진 그 오래된 집이 바로 이 집 건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집은 포도를 고르는 걸 아주 깐깐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랑 크뤼는 새 오크통 비율을 50% 정도로 맞춰서 12~14개월쯤 숙성한다고 합니다. 샹베르탱 말고도 샤름 샹베르탱, 샤펠 샹베르탱, 마조예르 샹베르탱 같은 그랑 크뤼를 여럿 만듭니다.
2015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2015년 부르고뉴는 날씨가 덥고 햇볕이 좋았던 해로 많이 이야기됩니다. 포도가 잘 익어서 와인이 진하고 부드러운 편이라 일찍부터 좋은 빈티지로 꼽혔습니다.
영국의 오래된 와인 상점 베리 브라더스 앤 러드에서는 이 병의 마시기 좋은 시기를 2021년부터 2044년까지로 적어 두었습니다. 지금이 2026년이니 이미 마실 수 있는 때로 들어와 있고, 앞으로 20년 가까이 더 둬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따기엔 너무 이르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되는 병입니다. 반대로 서둘러 마셔야 하는 병도 아니고요. 이런 와인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급하게 정하지 말고, 꼭 기억하고 싶은 날을 하나 골라 두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 병은 언제 따게 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이 병은 아직 언제 딸지 못 정했습니다. 이름을 하나씩 풀어 보고 나니 더 아까워졌거든요. 밭 이름이 마을 이름까지 바꿔 놓은 곳, 나폴레옹이 전쟁터까지 챙겨 갔다는 밭, 거기다 오래된 나무에서 딴 포도라고 하니 아무 날에나 열 수는 없겠더라고요.
오늘은 마시지 않고 라벨만 실컷 읽었습니다. 그래도 처음 꺼냈을 때는 길고 어려운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샹베르탱, 그랑 크뤼, 비에이유 비뉴가 각각 무슨 말인지 보입니다. 이 병을 따는 날이 오면 그때 맛과 향, 같이 먹은 음식까지 다시 적어 보겠습니다.
부르고뉴 와인 이름이 길어서 막막하신 분은 오늘처럼 한 단어씩 끊어서 읽어 보세요. 밭 이름, 등급, 나무 나이, 만든 집 순서로 보면 생각보다 금방 읽힙니다.
'셀러에서 꺼낸 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코스트코 와인 장보기, 2023 보르도 그랑 크뤼 두 병이랑 남편 데일리 세 병 샀어요 (0) | 2026.10.13 |
|---|---|
| 결혼한 해 2003, 아들 태어난 해 2004… 우리 집 셀러에 남은 기념일 와인 두 병 (4) | 2026.10.11 |
| 샤또 오존 2001, 일본 여행길에 사 온 생테밀리옹 와인 라벨 읽기 (1) | 2026.10.09 |
| 콜긴 와인 IX 에스테이트 2005, 생일날 마신 나파 밸리 컬트 와인 이야기 (1) | 2026.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