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희 집 장식장 옆에는 빈 와인병이 하나 서 있습니다. 와인은 한 방울도 없는데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라벨이 아까워서요. 샤또 라피트 로칠드(Château Lafite Rothschild) 1995입니다.

와인 들고 고깃집에 간 날
그날은 지인 부부와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 집 바깥양반이 와인에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을 때였어요. 그래서 남편이 "그럼 우리가 와인 들고 갈게, 고기는 거기서 사자" 하고 셀러에서 두 병을 꺼냈습니다.

출발 전, 라피트 로칠드 1995와 피숑 랄랑드 2005
출발 전에 식탁 위에 나란히 세워 두고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왼쪽이 라피트 로칠드 1995, 오른쪽이 샤또 피숑 롱그빌 콩테스 드 랄랑드(Château Pichon Longueville Comtesse de Lalande) 2005입니다. 이름이 길어서 다들 줄여서 '피숑 랄랑드'라고 부릅니다.
라피트는 2013년쯤 신세계백화점 와인 코너에서 산 병입니다. 남편 기억으로는 그때 150만 원 정도 줬다고 해요. 그렇게 산 병을 셀러에 두었다가 고깃집 테이블에서 딴 거죠.
간 곳은 해운대에서 꽤 이름난 고깃집이었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아서 없어졌어요. 가게에 와인을 가져가 마시려면 보통 '콜키지'라는 걸 냅니다. 술을 가져가는 대신 잔이나 오프너를 쓰는 값으로 병당 얼마씩 내는 거예요. 요즘은 콜키지를 받지 않는 '콜키지 프리' 가게도 많아졌지요.
그땐 비싸고 말고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150만 원짜리 병이라는 걸 그날 저희는 따지면서 마시지 않았습니다. 와인을 막 이것저것 마셔 보던 때라, 좋은 와인이 있으면 좋은 사람들이랑 따서 마시는 게 당연했어요. 지금처럼 라벨을 들여다보고 빈티지를 찾아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해운대 고깃집 테이블, 물김치 옆에 선 라피트와 피숑 랄랑드
이 사진은 이미 한참 마신 뒤에 찍은 겁니다. 물김치 그릇은 반쯤 비었고, 열무김치는 줄기만 남았고, 잔에는 와인이 조금씩 남아 있어요. 이 사진이 남편 휴대폰 사진첩에 남아 있어서, 블로그를 쓰면서 다시 찾아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이런 병을 고깃집에 들고 가는 게 아깝다고 할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마신 게 잘 마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와인을 처음 알아 가던 지인한테 그날 그 두 병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생각하면요.
나중에 들으니 그날 찍은 사진을 본 지인의 지인들이 다들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와인 좀 아는 분들은 라벨만 보고도 "이걸 고깃집에서 땄다고?" 했다더라고요. 정작 그날 저희 테이블은 고기 굽고 김치 집어 먹느라 바빴는데 말이에요.
같은 마을에서 온 두 병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그날 사진을 다시 보다가 재미있는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두 병 라벨에 똑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어요. PAUILLAC(포이약).
포이약은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 지역에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보르도에는 1855년에 정한 와인 등급이 있는데, 제일 높은 1등급은 다섯 곳뿐입니다. 그중 라피트 로칠드, 라투르, 무통 로칠드 세 곳이 이 포이약 마을에 있어요. 작은 마을 하나에 1등급이 세 개나 몰려 있는 셈입니다.
- 라피트 로칠드: 1855년 등급에서 1등급. 보르도 1등급 다섯 곳 중에서도 늘 맨 앞에 이름이 불리는 곳입니다.
- 피숑 랄랑드: 같은 등급표에서 2등급. 라벨에 GRAND CRU CLASSÉ라고 적혀 있습니다. 1등급 라투르와 포도밭이 맞닿아 있고, 다른 포이약 와인보다 메를로 포도를 많이 쓰는 편이라 부드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그날 저희는 같은 마을의 1등급과 2등급을 한자리에서 같이 마신 겁니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둘 다 맛있다" 하고 말았지만요.
1995년과 2005년, 연도도 좋았습니다
남편 말로는 두 병 다 빈티지가 좋은 해였답니다. 찾아보니 정말 그랬어요.
보르도는 1990년대 초반에 비가 많이 와서 몇 해 고생을 했는데, 1995년에 오랜만에 제대로 잘 익은 해가 왔습니다. 특히 라피트가 있는 메독 쪽 평가가 좋았다고 해요.
2005년은 더 유명합니다. 보르도에서 손에 꼽히는 해로, 와인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서 "2005년 보르도"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정도예요. 아들이 태어난 해가 2004년인데, 바로 다음 해가 워낙 좋아서 2004년은 그늘에 가려진 해로 불립니다. 그 2005년이 바로 이 피숑 랄랑드입니다.
좋은 해 와인 두 병을 고깃집 테이블에서 같이 딴 거였네요. 이제 와서 알게 되니 조금 웃깁니다.
빈 병 뒷면에서 찾은 날짜

라피트 로칠드 1995 뒷면 한글 스티커, 병입일 1997년 6월 2일
빈 병을 버리지 않길 잘했다 싶은 게, 뒷면 한글 스티커를 다시 읽다가 몰랐던 걸 알게 됐거든요.
스티커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제품명: 샤또 라피트 로칠드 1995
- 원산지: 프랑스
- 제품유형: 과실주
- 첨가물: 이산화황(산화방지제)
- 수입원: 나라식품(주)
- 병입일: 1997.06.02
여기서 눈에 들어온 게 병입일, 병에 담은 날짜입니다. 라벨에는 1995라고 적혀 있는데 병에 담은 건 1997년 6월이에요. 1995년 가을에 포도를 따서 와인을 만들고, 오크통에서 2년 가까이 묵힌 다음에야 병에 넣었다는 뜻입니다.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이고, 병에 담은 날은 따로 있다는 걸 이 스티커 한 장이 보여 주고 있었어요.
앞면 라벨 맨 위에 작게 적힌 MIS EN BOUTEILLE AU CHATEAU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불어로 '샤또에서 병에 담았다'는 뜻이에요. 다른 데로 옮기지 않고 와인을 만든 그 집에서 직접 병에 넣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빈 병을 모읍니다
와인을 다 마시고 나면 남는 건 병뿐인데, 저는 이 병들이 사진첩 같습니다. 라벨을 보면 그날 누구랑 어디서 뭘 먹었는지가 떠오르거든요. 라피트를 보면 해운대 그 고깃집 물김치 맛부터 생각나니까요.
셀러에는 아직 따지 않은 병이 더 많지만, 이렇게 다 마시고 남긴 병들도 하나씩 꺼내 보려고 합니다. 빈 병도 이야기가 있으면 충분히 한 편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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